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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아, 어떤 마음을 먹을테야?

하루 한 편, 시

by 함기대 2024. 3. 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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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만 책

 

                     오은

 

핑계는 언제든지 댈 수 있다.

책 속에만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워요

재미가 없어요

취향이 안 맞아요

유행이 지났어요

제목과 달랐어요

시기를 놓쳐버렸어요

결말을 알아버렸어요

영화로도 나왔더라고요

최근에 야근이 많았어요

좀 한가해지니 앞부분이 기억나지 않았어요

급하게 읽을 다른 책이 생겼어요

더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어요

 

 

끄집어내고 갖다 붙일 사연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책 속의 주인공은 할 말이 있는데

우리는 입을 다물린다

책 밖에서는 우리가 주인공

할 말이 많아서

대사는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책 밖의 세계에서는

실시간으로 페이지가 넘어가는데

책 속의 주인공은 머뭇거리고 있다

한동안 그럴 것이다. 혹은 영영

 

 

다문 입으로

다 읽은 책은 말이 없다

닫힌 입으로

읽다 만 책은 말이 없다

 

사다 만 책은 없다

빌리다 만 책이나 버리다 만 책은 없다

읽다 만 책만 있다

 

다 읽은 책에는 먼지가 쌓인다

읽다 만 책에도 먼지가 쌓인다

하루하루의 더께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당분간 책갈피는 움직이지 않기로 한다

반쯤 열리거나 반쯤 닫힌 입으로

산 입에 거미줄을 치는 표정으로

제자리를 집요하게 더듬는 걸음으로

 

무수히 접한 처음들

무수히 남은 마지막들

 

마음이 한번 마음먹고 얼면 봄이 돼도 녹지 않는다.

 

 

 

 

시인 : 오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다음 소프트'에서 '오은 대리'로 일했던 독특한 이력의 시인입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보니

 

"겁이 많아서 여행보다는 산책이 좋아요.

산책하면서 세상을 관찰하는 것도 좋고."

 

이런 인터뷰 내용이 있었어요.

섬세하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소유한 시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호기롭게 책을 집어 들고는 무심코 책을 놓아버리곤 하죠.

'읽다 만 책'은 무심함 눌리고 먼지에 덮여 짐짝이 되고 마는데요.

잊히는 대상에게는 '무심코'가 저지르는 고의성 없는 횡포일지 모르겠습니다.

시를 읽는 내내

우리의 변명들 속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작가의 혼과 정신과 마음이 전해지지 못하는 책들의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이런 무심함이 비단 책에만 국한될까요?

 

저도 무심, 무덤덤한 사람이라 더 마음이 찔려옵니다.

어떤 것을 잊지 않고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것이라 소중히 여기는 시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따라가 보려는 마음으로

오은 시인의 산문집 '다독임' 중 일부를 나눠봅니다.

 

내가 보고 듣고 겪고 느낀 일이 나의 일상을,

나아가 나의 인생을 구성한다.

개중에 어떤 것은 추억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를 호명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점점 희미해진다.

무수한 '한번'을 소환하 할 때 나는 좀 더 나다워진다.

이때 글쓰기는 나를 지키려는 안간힘이자 마침내 나를 지켜내는 작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이미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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