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클레어 키건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 태생.
1999년 첫 단편집 '남극'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하며 데뷔.
이후 '푸른 들판을 걷다' '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 발표.
24년 동안 단 4권의 책을 냈지만 하나같이 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4권의 책에 얼마만큼 삶을, 혼을 갈아넣었는지 미뤄 짐작해 봅니다.
내용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쓰여져 있습니다.
18세기에서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지원 하에
가톨릭 수녀원은 모자보호소와 세탁소 등을 운영했는데요.
수녀원이라는 성스러운 담장 너머는 뜻밖에도
불법적인 노동 착취와 인권유린의 악취로 가득했습니다.
소설은 이런 비열하고 잔혹한 참상을 드러내놓고 집중해서 드러내기보다
날씨와 풍경 등의 은유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오히려 그것이 더 피부로 와닿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소설가 최명희 선생이 한 글자 한글자 바위에 손으로 새기듯
집필하셨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마을은,
예년보다 매서운 날씨와 뜻하지 않은 경제적 빈곤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석탄과 목재상을 운영하는 주인공 빌 펄롱이 아내에게 건넨 한 마디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얼핏 알고 있었어요. 수녀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극히 현실적인 펄롱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걔들은 우리 딸들이 아니라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마음일 거예요.
그들뿐일까요?
우리도 그렇죠.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높여야 할 일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곤 합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처럼 앞으로 나서다가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우리니까요.
주인공 빌 펄롱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유복자입니다.
펄롱의 어머니는 미시즈 윌슨 가의 하녀였는데,
미시즈 윌슨은 10대에 임신한 펄롱의 어머니를 내치지 않고 돌봐줍니다.
그 덕분에 펄롱은 윌슨 가의 안락함 속에 성장하게 되죠.
마을 사람들은-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죠-
펄롱이 미시즈 윌슨 아들의 자녀 혹은 친척의 자녀이기 때문에
미시즈 윌슨이 돌봐주는 것이라고 추측,
자기 확신을 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라는 것이 그들의 가장 튼튼한 근거였을 겁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도 잘 자란 펄롱은
결혼을 하고 다섯 딸의 아버지로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가난한 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움을 주려는 선한 양심의 소유자이지만,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가진 것을 잘 지키고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수녀원과 척을 지면 모든 것을 덮고 사는 마을 사람들과도 관계가 힘들어집니다.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수녀원의 잔혹함을 참견은커녕 아는 척하기란 어려운 일이죠.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모르는 척하는 것이 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펄롱은 수녀원의 일이 계속 마음에 파고드는 걸 느낍니다.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과
자신이 걸어가고 싶은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빌 펄롱이 내린 결론은 과연 무엇일까요?
감상
저는 무엇보다 작가가 섬세하게 짜놓은
작품의 무늬가 결국은 서로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것을 보며
감탄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줄거리를 쫓아갔지만
두 번째 읽을 때는 문장 하나하나의 묘사가 알려주는 깊이를 음미하며
가슴이 뛰었어요.
펄롱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가장 마음에 남는 건
소설의 첫 부분이었습니다.
매서운 날씨에 대한 묘사들이 쭉 이어지고 있었는데요.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 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
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
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그러다가 밤이 왔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누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꿇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뜻하지 않은 맹추위.
이것은 어떤 인생이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매서운 순간들이
닥칠 수 있다는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수녀원에 갇힌,
자신의 의지로는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그녀들과 고아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게 될 줄을.
마을 사람들은 '우리는 저렇게 되지 말자'라는 암묵적 다짐이나
'그렇게 될 리 없어!'라는 자기 최면적인 예언 속에
수녀원 담장 너머를 모르는 척합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먼 바닷속에서 시작되는 해일처럼
깊은 땅속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처럼
뜻하지 않은 일들이 닥쳐와
결국 그들의 인생이 내 인생이 될 수 있음을
작가가 날씨를 빌어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손쉬운 선택이 어떤 내일을, 어떤 사회를 만들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나의 시대는 안온히 끝날 수 있지만
다음 세대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뒤돌아보지 않는 침묵, 손쉬운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지금 지구의 환경문제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분노는,
누구보다 생명을 지켜야 할 수녀원의 악행,
다 함께 소리를 냈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을
마을 사람들의 이기적 침묵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어요.
현실 앞에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는 나 자신에 대한 성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펄롱과 같은 치밀한 내면의 갈등이라고 있었으면 합니다.
그냥 나와 상관없다며 모르는 척 지나가지 않는 인생이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한나 아렌트가 얘기했던
'사유의 부재'가 떠오르는,
단편이지만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묵직한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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