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정호승
경상남도 하동 출생
1972년 등단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출간
지금까지 14권의 시집 출간.
정호승 시인이 중학교 시절, 시를 써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요.
수업시간에 정호승 시인을 지목해 발표하게 한 선생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를 다 듣고 난 국어 선생님은
"아주 잘 썼군. 넌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앞으로 열심히 한 번 써 봐."라고 칭찬해 주셨는데요.
선생님의 격려는 정호승 시인이 시인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었다고 합니다.
이 한마디로 시인의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정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시인을 꿈꾸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등을 살푸시 다정하게 밀어준 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난 2022년 등단 50주년 신작을 펴내며 열린 기념 북토크에서 밝혔듯이,
직장생활을 하느라 17년간 시를 놓은 적이 있지만,
결국 천상 시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찾았고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적시는 대표적인 서정시인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쉬운 언어로 현실의 이야기를 시로 쓰고자 한다."
시인의 말대로 정호승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힙니다.
간명한 시어, 인상적인 이미지를 담아내 마음 깊이 닿습니다.
정호승 시인에게 시인으로써 영향을 준 인물 가운데 한 분은
바로 어머니인데요.
고등학교 1학년 정호승 시인은 우연히 부뚜막에 놓여있던
어머니의 노트를 보게 되었다고 해요.
노트에는 어머니가 지은 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시는 가난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의 시이자,
절망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의 시들로
내 가슴에 각인돼 있다.
지금 내가 쓰는 시들도 그렇다.
시는 내 사람의 고통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의 시 속에는 예전에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고 오솔길이 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구 산동네에서 성장하면서
시인이 겪은 가난, 젊은 시절의 애정과 이별
이를 통한 성찰과 애환은
모두 시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데요.
정호승 시인의 시가 가진 깊이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의지,
절망을 경험했지만 절망에 넘어지지 않는 심지
그럼에도 원망하지 않고 불평의 언어를 내지 않으며
따스하고 다정한 마음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선에서
빚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인이 꽃을 바라봤을 때,
아직 꽃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꽃씨 속에
꽃이 있다고, 숨은 꽃을 볼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에 많이 의지하고 집중합니다.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랑도, 다정함도, 공기도, 에너지도
중요한 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죠.
꽃을 보려면
꽃씨 속에 숨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꽃을 피울 줄을 알고 기다릴 수 있겠지요.
마음에 칼을 품으면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꽃이 피어나도
칼을 휘두르러 가는 길에 밟고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봄비가 내릴 것 같은 주말
봄비를 맞고 피어날 꽃을 기대하며
행복하고 따스하게 보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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